이웃집 소년. 마알간 볕 맞으며 마루에 앉아 나무를 손질하며 끼워 맞추고 있는데(왜 그런 짓을 하냐고? 그게 내 직업이다. 직업의 분류상 예술가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직업의 분류상이고 돈벌이가 시원찮아 반백수에 가깝다) 안 받아도 그만일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다. "서영진 고객님 맞으십니까?" 라는 낭랑한 음색. 역시나 안 받아도 무방한 전화였다. "저희는 A00 보험입니다. 일전에 상담 요청 남기신 것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그게 언제적 요청이란 말인가. 벌써 3개월도 더 넘은 이야기이고, 이미 3개월도 더 전에 다른 보험을 가입했다. 그리고 분명 거절했는데 잊지 않고 또 이렇게 전화를 주셨으나, 하나도 안 고맙다. 보험하고 무관한 생을 살 것같은 내가 보험에 가입하게 된 데에는 지랄맞은 성질머리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좋은 사람이 있고, 그 좋은 사람이 나 사는 모양새가 영판 답이 안 나온다 싶었는지, 한 달에 10만 원 짜리 하나를 선물해줬다(언제까지 넣어 줄 지는 미지수다, 만 공짜가 싫을 리 없다). "네. 맞네요." 그런데 전 이미 다른 보험을 가입했네요, 라는 말이 내 뱉기도 전에, 일목요연한 상품설명을 일사천리로 뿜어 낸다. "이번에 새로 출시된 A00 무배당 뭐시기 상품인데요, 사대 암과 십대 중과실이 어쩌고 저쩌고 했을 경우, 이런 저런 요런 사항이 기본 제공 되구요, 뿐만 아니라 추가사항으로 뭣이? 뭐라고? 얼씨구~ 등등의 선택이 가능하며 또...그래서 저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군, 저랬군, 잘 했군 잘 했군, 잘 했어...해서, 월 오만 구천 원입니다."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미 다른 상품을 구매했네요. 그래서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니 보험과 이 보험은 아주 그냥 질적으로 차이가 확 나는 제품이며 니 보험의 문제는 무엇이며(니가 내 보험을 알아?) 그 문제들을 이 보험이 고스란히 해결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사라, 라는 내용을 또한 일목요연하게 풀어 덴다. 5만 9천 원 짜리가 9만 6천 원 짜리 보험 보다 좋타는 것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뭐 따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따지려고 해도 내가 뭘 알지도 못하고 해서... "알겠는데, 잘 알겠는데, 거 내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라서 여유가 없고 또 마음도 없네요." "아니 고객님 막말로 인생..." 하며 정말 막말을 들이 붙는다. 그게 싫어 한 마디 했다. "내일을 걱정하고 사는 우리의 오늘은 죽어 있는 것 아니겠어요?" "네? 뭐라구요?" 이거 웬 헛소리, 쉰소리냐, 라는 뉘앙스가 진하게 베어있는 물음이다. "말씀마따나 인생 모르는 건데, 보통은 인간이 우려하는 일들의 96%는... " 그 이상은 말하지 못 햇다. 내 말을 대충 잘라 먹고 여전히 보험 설명에 열을 올린다. 그녀의 변에 따르자면 그 보험은 가히 천하무적이다. 월 5만 9천 원에 내 인생을 통째로 책임져 주겠다는 각오에 다름 아니었다. "알겠구요. 알겠는데, 돈이 없다니까요. 제가 얼마나 돈이 없으면 의료보험료도 안 내고 살겠어요?" "아니,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치 세금도 안 내고 어떻게 사세요?" "그럼 전 죽어야 하나요?" "국민이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죠. 세금을 내가 국가가 운영되고..." 이번엔 내가 잘랐다. "국가가 불량한데 국민이라고 불량하지 말란 법 있어요? 그래, 그 피 같은 세금을 빨아 들였으면 제대로 운용해야 할 것이지 대기업하고 짜고 치는 고스돕이나 벌리고 하나마나한 정책들이며... 그리고 또 거 사대강 이런 건 뭘라고 하는 거야? 심심해서 하는 거야? 더불어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인간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나 참 기도 안차서, 각계각층 비리축제하며... 국방부 애들도 가관이잖아요. 내가 그런 애들 믿고 단잠을 이루겠어요? 낮술에 취해 단잠을 이루다가도 그놈들 생각만 하면 아주 그냥 벌떡 벌떡 깨요, 내가." "아... 네 고객님! 고객님! 잠시만요." "그리고 또 우리나라 복지가 개판이잖아요. 어설프게 미국이나 따라 할라고 하고, 사실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복지는 미국이 아니라 북유럽에..." "아, 네. 알겠구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이봐요. 잠깐만요. 지금 내 말 듣기 싫은 거예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좀 바빠서요." "뭐, 난 놀아요? 나도 바쁜 시간 쪼개서 하시는 말씀 다 들어줬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끝을라고 해도 되요?" "아, 저 고객님. 지금 업무가 밀려서 통화가 어렵구요. 다음에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됐어요. 이럴 꺼면 다시 전화 주지 마세요!" 하여간 예의 없는 것들 천지다. 사실 세금 뿐 아니라 안 내는 것 천지다. 그 중 하나가 국제전화비인데, 썻으면 당연히 내야 되는데, 그걸 왜 안 내고 있냐? 요금이 연체된 고객에게 요금을 받아내야 겠다 싶으면 적어도 사람이 전화를 해서 육성으로 독촉을 해줘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그런데 이 국제전화 요금 청구는 사람이 아닌 기계의 음성만이 기계적으로 들릴 뿐이며 매일 그저 동일한 내용의 문자 메세지만 보낼 뿐이다. 아주 성의가 개판이다. 그게 짜증나서 안 낸다. 에라이, 예의 없는 것들.
다동
2011-11-22 00:24